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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통해 앞으로의 목표는 교육자와 학생들이 19세기 말, 1945년 분단 이전의 한국의 평화, 민주주의, 인권 운동에 대한 도덕적으로 풍부한 초국가적 서사와 연결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에 대한 너무 많은 서사들이 분단 이후 잔혹한 역사에만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도 물론 중요하지만, 세계시민주의 정신의 긍정적 역사를 구성하는 이야기들과 이것이 한국사와 갖는 연결고리 역시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기억을 통해 앞으로는 국내외 청중들에게 근대 한국사의 색다른 서사를 소개하는 간학문적 국제 프로젝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독립과 자결권, 민주주의 운동의 민주적, 비폭력적, 초국가적 측면들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틀을 통해 한국사와 미국사, 그리고 오늘날까지 국제적으로 이어져 온 법을 통한 평화운동 간의 연관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기본 전제는 이러한 연관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우리가 누구인지, 또는 무엇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철학자이자 평화민주주의 운동가인 함석헌(1901-1989)의 사상을 통해 알 수 있듯, 역사란 모든 세대가 계속해서 함께 달리고, 이전 세대가 물려준 건설적인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더 구축해 나가야 하는 일종의 이어달리기인 것입니다.  

3.1
운동은 이 프로젝트에서 핵심적이고 중점적인 부분을 차지합니다. 1945년 분단 이전에 일어난 이 중요한 운동은 영어권 청중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3.1 운동의 철학뿐만 아니라 이에 참여하고 이를 이어나간 몇몇 중요한 인물들도 조명합니다.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과 함석헌, 서재필은 모든 시민에게 도덕적 모범이 되는 많은 사람들 중 일부이며 연구될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비폭력과 화해를 강조했던 함석헌, 김대중과 같은 인물들의 노력으로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한국에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민주주의 운동과 같이 분단 이후의 이야기들도 함께 다룹니다. 저희는 강인함, 공감, 화해, 연민과 세계시민주의와 같은 미덕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들을 조명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와 같은 철학자들은 살아있는 본보기나 "도덕적 모범"들이 미덕의 함양을 위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맞는 말입니다. 이러한 본보기가 되는 인물들이 없으면 미덕 함양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고 인간은 길을 잃게 됩니다. 저희는 이 웹사이트에 소개된 인물들에 대한 연구가 인간 정신을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물들 이외에도 국제적 화합, 이해와 유대감에 대한 긍정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는 중요한 1차 자료들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본 홈페이지의 웹사이트 활용하기부분에서 자세히 나와 있듯, 저희가 활용하는 몇몇 특정한 어구들이 있습니다 (링크). 저희는 복잡한 이야기에 진입하는 지점을 말할 때 숲에 들어간다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수천년에 걸친 한국사의 숲을 어느 지점에서 들어가야 할까요? 이 프로젝트에서 저희는 사람들이 더 조화롭고 존엄하며 덜 폭력적인 세상을 조직하기 위해 막 시작한 시기인 19세기 후반에 에 진입합니다. 한국은 통일되었고, 한국인들이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을 갖기 위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빈번히 배제되곤 하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재편될 때 한국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다시 한번 재편될 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독립, 자결권, 자주성, 인간 존엄성, 유대감, 공동체, 그리고 옳음권력에 앞서는 것 등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과 다시 연결되고 영감을 얻을 수 있게끔 해주는 귀중한 수단입니다.  

기억을 통해 앞으로(Forward into Memory)’ 호프 엘리자베스 메이 교수가 풀브라이트 시니어 연구자, 그리고 국제 연구자로 대한민국 남양주에 위치한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에 재직하던 2017년에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3.1 운동에 초점을 맞춘 그녀의 강의를 수강한 수강생들은 프로젝트를 구축하는 도움이 되었으며, 그들의 기여 일부는 여기에서 확인할 있습니다. 함석헌의 철학과 세계시민주의 연관성에 대한 전문가인 서울대학교의 이성청 교수 덕분에 현재 서울대학교 대학원생들로 이루어진 팀이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함석헌에 대한 페이지에서 메이 교수와 이성청 교수가 센트럴 미시간 대학교 학생들과 함께한 팟캐스트 에피소드를 들을 있습니다.



이태영은 (1914-1998)


내가 일을 시작했을때 난 할수 있는게 없었지요, 하지만 노력으로 나는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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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영은 독립운동부터 민주화운동인권운동에 기여한 사회운동가 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다현재의 한국가정법률상당소를 세운 선구자 이기도 하다이태영이 헌신하고 기여한 업적들로 볼때한국 현대사에서 대단한 인물중에 한명임을 인식할수 있다
 
 
이태영은 1914 북한 운산의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남자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받을수 있었다. 1932 이화여대를 졸업한후도산 안창호의 주선으로 교육자독립투쟁의사사회운동가인 정일현과 1936 결혼하였다
 
 
해방후 이태영은 그시대의 어느 가정주부처럼 자녀 양육에 힘쓰면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한편에선 그당시 여성으로써 생각하기 힘든 법학공부에 열의를 두고 있었다남편 정일현은 이러한 이태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웠다그결과서울대학교 법학대학에 진학할수 있었고, 1949 학위를 마칠수 있었다하지만 변호사가 되고싶던 꿈은 한국전쟁 발발로 미뤄져야 했다전쟁동안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하지만 "뜻이있는곳에 길있다"라는 어귀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어려운 피난민 처지에서도 열의를 놓치지 않고 사법시험 공부에 매진 하였다. 1952 사법시험 합격후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될뻔 했으나당시 남편 정일현이 야당의원이라는 이유로 이승만은 그녀의 판사 임용을 거부하였다그리하여 그녀는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52 이태영은 법인회사를 열어 운영하면서 가정법과 관련된 소송등에 열의를 가지게 된다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구시대적인 가정법과여성인권의 향상에 필요한  개정 등을 주도하였다. 1956 여성법률상담소를 창립하여 당시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호주제폐지운동동성동본결혼가능운동 등을 이끌어 나아갔다이러한 이태영의 근대적이고 개혁적인 사회운동들은 보수적인 성리학자들로 부터 전통적인 남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비판받았다이후 여성법률상담소는 1966 한국가정법률사무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오늘날에 이르렀다그녀는 1986 한국가정법률사무소 3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시작은 귀중하게 태어난 인간이  앞에서라도 만인이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신에 기초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1972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열린 국제변호사협회총회에 참석하여 여자변호사로는 최초로 개회연설을 하였다그녀는  연설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기울이고 도와줄 여성 변호사를 5,000 동안 기다려  여성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법의 보호를 받아야  여성의 권리는   없고 오히려  때문에 억울한 여인이 되어야 하는 것에 분노한다 말하였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절엔 남편 정일형과 함께 주권의 자유는 국민으로 부터 나와야 한다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고, 1976년에는 3.1 민주 구국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였다박정희 정권은 정권 전복 선동 혐의와 정치적 이견을 이유로 1977 그녀의 변호사 면허증을 말소하였고정일형은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0년에 다시 변호사로 복권되기 까지 여성인권 향상 운동에 집중하였다
 
 
이태영은 그녀와 남편과 함께 김대중의 정치,사회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그를 여러방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김대중이 정치적 보복과 여러 어려움에 처했을때 그의 증인을 자처해 주었고변호에도 힘써주었다. 1980 김대중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을 받을때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의 결백을 주장하였다이태영은  검사관에게 "눈이 나빠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 안경을 하나  끼우고 사람을 똑바로 보시오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란 말이오자식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소?" 라고 호통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생전 인터뷰에서 "내가 일을 시작했을때  할수 있는게 없었지요하지만 노력으로 나는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내가 영향력을 미치는것이 있다면 한국여성을 악법으로부터 해방시키는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법률제정 경험과 함께 가족법 개정 운동은 계속되어 왔습니다숙명적으로 내게 지워진 사명이지요정의 평등의 실현은 여성문제 해결에서부터 시작됩니다여성이 제대로 대접 받는것이 또하나의 절반인 남성그리고 여성그리고 인류 전체에 도움이 될것입니다라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상하였다

1.  프레시안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21.08.18.- 여성운동가 이태영, 5백년 묵은 '차별의 ' 부수다 [손호철의 발자국] 70. 서울 여의도 :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81723053654758

2.
피플투데이 정근태 2014.12.17 - [오늘의 인물] 19981217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별세
http://www.epeople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3515

 3.   [역사 속의 이화DNA#4] 이태영
https://www.youtube.com/watch?v=MTXIxSR8on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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