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을 시작했을때 난 할수 있는게 없었지요, 하지만 노력으로 나는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태영은 독립운동부터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기여한 사회운동가 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 이다. 현재의 한국가정법률상당소를 세운 선구자 이기도 하다. 이태영이 헌신하고 기여한 업적들로 볼때, 한국 현대사에서 대단한 인물중에 한명임을 인식할수 있다.
이태영은 1914년 북한 운산의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남자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받을수 있었다. 1932년 이화여대를 졸업한후, 도산 안창호의 주선으로 교육자, 독립투쟁의사, 사회운동가인 정일현과 1936년 결혼하였다.
해방후 이태영은 그시대의 어느 가정주부처럼 자녀 양육에 힘쓰면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편에선 그당시 여성으로써 생각하기 힘든 법학공부에 열의를 두고 있었다. 남편 정일현은 이러한 이태영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웠다. 그결과,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에 진학할수 있었고, 1949년 학위를 마칠수 있었다. 하지만 변호사가 되고싶던 꿈은 한국전쟁 발발로 미뤄져야 했다. 전쟁동안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이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뜻이있는곳에 길있다"라는 어귀를 마음속에 새기면서 어려운 피난민 처지에서도 열의를 놓치지 않고 사법시험 공부에 매진 하였다. 1952년 사법시험 합격후 최초의 여성 판사가 될뻔 했으나, 당시 남편 정일현이 야당의원이라는 이유로 이승만은 그녀의 판사 임용을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52년 이태영은 법인회사를 열어 운영하면서 가정법과 관련된 소송등에 열의를 가지게 된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의 구시대적인 가정법과, 여성인권의 향상에 필요한 법 개정 등을 주도하였다.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를 창립하여 당시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호주제폐지운동, 동성동본결혼가능운동 등을 이끌어 나아갔다. 이러한 이태영의 근대적이고 개혁적인 사회운동들은 보수적인 성리학자들로 부터 전통적인 남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비판받았다. 이후 여성법률상담소는 1966년 한국가정법률사무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녀는 1986년 한국가정법률사무소 3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의 시작은 귀중하게 태어난 인간이 법 앞에서라도 만인이 다 평등하게 살아야 한다는 정신에 기초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1972년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열린 국제변호사협회총회에 참석하여 여자변호사로는 최초로 개회연설을 하였다. 그녀는 이 연설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도와줄 여성 변호사를 5,000년 동안 기다려 온 여성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는 느낌을 받았다” 며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여성의 권리는 간 데 없고 오히려 법 때문에 억울한 여인이 되어야 하는 것에 분노한다”고 말하였다.
1970년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절엔 남편 정일형과 함께 주권의 자유는 국민으로 부터 나와야 한다는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하였고, 1976년에는 3.1 민주 구국 선언문 작성에 참여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정권 전복 선동 혐의와 정치적 이견을 이유로 1977년 그녀의 변호사 면허증을 말소하였고, 정일형은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0년에 다시 변호사로 복권되기 까지 여성인권 향상 운동에 집중하였다.
이태영은 그녀와 남편과 함께 김대중의 정치,사회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를 여러방면으로 지원해 주었다. 김대중이 정치적 보복과 여러 어려움에 처했을때 그의 증인을 자처해 주었고, 변호에도 힘써주었다. 1980년 김대중이 내란음모사건으로 재판을 받을때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이태영은 군 검사관에게 "눈이 나빠 사람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 안경을 하나 더 끼우고 사람을 똑바로 보시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란 말이오! 자식들한테 부끄럽지도 않소?" 라고 호통치는 대범함을 보여주었다.
생전 인터뷰에서 "내가 일을 시작했을때 난 할수 있는게 없었지요, 하지만 노력으로 나는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영향력을 미치는것이 있다면 한국여성을 악법으로부터 해방시키는일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법률제정 경험과 함께 가족법 개정 운동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숙명적으로 내게 지워진 사명이지요. 정의 평등의 실현은 여성문제 해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성이 제대로 대접 받는것이 또하나의 절반인 남성, 그리고 여성, 그리고 인류 전체에 도움이 될것입니다" 라고 자신이 걸어온 길을 회상하였다.
1. 프레시안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2021.08.18.- 여성운동가 이태영, 5백년 묵은 '차별의 벽'을 부수다 [손호철의 발자국] 70. 서울 여의도 :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81723053654758
2. 피플투데이 정근태 2014.12.17 - [오늘의 인물] 1998년12월17일,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별세
http://www.epeople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3515
3. [역사 속의 이화DNA#4] 이태영
https://www.youtube.com/watch?v=MTXIxSR8onU